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외교적 방법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함께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이는 중국의 정사나 삼국사기가 이를 뒷받침 해 준다. 중국의 정사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나온 같은 무리라고 적혀 있다. 또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고유의 왕명을 썼고, 중고에서는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부터 진덕여왕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했으며, 하고에서는 무열왕부터 경순왕까지 중국식 시호를 사용했다.
한편 통일신라의 중앙정치 조직이나 지방 · 군사 제도의 재편성은 대부분 중대에 정비되었는데, 이러한 제도의 정비는 왕권을 강
계산이다. 당으로 천족된 호구는 약 13만호이다. 69만 가운데 56만호는 그들의 거주지에 살다가 신라로 옮겨갔다. 그들의 거주지에 살던 사람들은 발해의 주민이 되었다가 발해가 망한 후에 압록강 이남 주민들은 고려에 편입되었고, 압록강 이북의 발해유민들도 상당수 고려에 내투했다. 내투하지 않은
1.필자는 과학적인 역사와 비과학적인 역사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필자는 역사를 크게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구분하고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객관적인 사실을 의미하고,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바탕으로 역사가가 재
한국사회는 지난 반만년의 역사를 외부와 교류하며, 혹은 외부와 단절하며 발전해 왔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고구려, 신라는 중국과 백제는 일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에 신라방이 설치되고 유학생과 승려들의 왕래가 잦았고, 고려는 초기에 송과 잦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절. 법흥왕22년(535) 개산(開山)이라 전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경덕왕10년(751)에 김대성(金大城)이 석굴암과 동시에 건설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장엄세
백제 때의 지명은 미추홀이고, 고구려 때의 지명은 매소홀이었다. 그리고 당시 인천은 군 또는 현의 위격이었으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 영역의 넓이가 어떠하였는지는 밝힐 수가 없었다.
통일신라시대 인천의 명칭은 경덕왕 때 소성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소성현으로 변경된 이유에 대해서는
신라는 삼국통일을 분수령으로 하여 전기 고신라와 후기 통일신라로 구분 할 수 있다. 고신라는 중국 강남의 문화와 교류되어 대륙적인 것을 소화하고 한민족적인 생활 감정과 풍토미가 융합된 시대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3국을 통일한 이후부터는 불교문화의 번성
중국이 북한붕괴이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심지어 신라지역까지의 연고권을 주장하며, 향후 다툼의 여지를 만들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은 과도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분명히 통일한국의 출현은 한반도의 민족주의가 고양될 것이고, 이것은 중국 국경